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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일반

홍길동 실존인물인가? 드라마 역적에서의 홍길동

홍길동, 실존인물일까?

드라마 역적에서 그려지고 있는 홍길동에 대해



이하 출처 https://goo.gl/VOHVu4


태생

홍길동(洪吉同)은 1443년경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홍상직(洪尙直)의 얼자(孼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홍징(洪徵)의 얼손(孼孫)이며, 이복 형은 홍귀동(洪貴童), 홍일동(洪逸童)이라 한다.




홍길동은?

 - 역사 기록이 전하는 홍길동의 주요 활동지는 처음에는 충청도 충주(忠州) 일대

 - 산속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흔적은 없다. 

 - 홍길동(洪吉同)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며 무리를 이끌고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등도 알아볼 정도였으며, 

 - 일반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 이로 인하여 조정은 홍길동(洪吉同)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다.

 - 조정에서는 홍길동(洪吉同)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다. 

 - 홍길동(洪吉同)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순(嚴貴孫)은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았으며 옥사하였다.

 - 연루된 권농(勸農), 이정(里正)과 같은 지방 관리들을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 조선시대 얼자(孼子)였던 홍길동(洪吉同)은 당연히 양반의 갓을 쓸 수 없었다. 

 - 홍길동(洪吉同)과 같은 도당으로 여겨져 옥사한 엄귀손(嚴貴孫)은 당상무관(堂上武官)으로 

 - 본래는 노복(奴僕)과 재산이 없었는데, 한양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4천 석이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홍길동과 서로 내통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 당상무관(堂上武官) 신분이었던 엄귀순의 행적이 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 소설에서와 같이 당상관 가문이었으면 기록이 있었을 것이나, 그 정도의 고위층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허균의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 우리가 흔히 아는 홍길동의 등장

 - 홍길동(洪吉同)은 조선 시대 지배층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거론될 정도였다. 

 - 허균은 조선 시대의 불합리한 서얼(庶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

 -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 허균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이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 홍길동(洪吉同)을 호민의 대표로 형상화하여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홍길동(洪吉同)

 -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홍길동(洪吉同)은 1443년(세종 25년)경에 출생

 - 1510년(중종 5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 이러한 과정에 그의 처단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삼정승이 연산군에게 홍길동(洪吉同)이 잡혔다는 보고를 하는 기사이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연산 6년, 명 홍치 13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同)

 - 홍길동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이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다. 

 - 홍길동(洪吉同)의 출생을 1443년경(세종 25년)으로 보는데, 

 - 그의 아버지 홍상직(洪尙直)은 1424년경(세종 6년)에 이미 유명(幽冥)을 달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길동이 등장하는 기록

 - 1420년(세종 2)10월 24일 : 홍상직(洪尙直)을 경성 절제사(鏡城 節制使)로 관직을 제수하다. 

 - 이때 데리고 살던 기녀(妓女) 옥영향(玉英香)이 등장한다. 

[세종실록 10권 3번째기사]


 - 1422년(세종 4) 12월 1일 " 홍상직(洪尙直)은 역모죄에 연루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이후 사헌부 재심을 거쳐 〈무고죄〉로 사형을 감하고 경상도 동래로 유배 되었다.

[세종실록 18권 4번째기사 / 경성 절제사 홍상직(洪尙直)을 귀양보내다]


- 1423년(세종 5) 12월 9일 : 경상도 동래로 유배한 홍상직(洪尙直)을 석방하여 돌려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22권 3번째기사]


- 1424년(세종 6) : 추국과 장독의 후유증으로 향리인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서 요양하다 유명(幽冥)을 달리하였다.


- 1428년(세종 10) 10월 28일 : 적모(嫡母) 남평 문씨(南平 文氏)에 대한 기록 

예조에서 경외(京外)의 효자(孝子)·순손(順孫)·절부(節婦)를 찾아내어 아뢰다. 경기도 적성(積城. 현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사람 절제사(節制使) 홍상직(洪尙直)의 아내 문(文)씨는 남편이 죽으매, 분묘 곁에 여막을 세우고 조석(朝夕)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면서 대상(大祥)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분묘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제(喪制. 3년상)를 마치고서도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여 가까운 동리에 살면서 매양 삭망(朔望)과 속절(俗節)에는 반드시 제사하였다.[세종실록 42권 6번째기사]


- 사후 1444년(세종 26) 7월 22일 : 1423년(세종 5) 사헌부(司憲府) 재심(再審)을 통해 사형(死刑)을 면하고, 석방된 절제사(節制使) 홍상직(洪尙直)에 대해 데리고 살았던 기녀(妓女) 옥영향(玉英香)의 진술(眞術)등을 토대로 함길도 도관찰사에게 재직시 비행(非行)에 대해 추문(推問)하여 핵실(覈實)하도록 명하다.[세종실록 105권 기사 3번째기사])





드라마 역적의 홍길동 배경